종이 도면 없이 만든 첫 비행기

보잉 777 CATIA 디지털 설계 일러스트
TL;DR
  • 1994년 4월 공개된 보잉 777은 세계 최초로 물리 목업 없이 100% 디지털로 설계·사전조립된 상용기였다
  • 1991년 4월 보잉·IBM·다소 시스템이 계약을 체결하고 CATIA V3로 전체 설계를 옮겨갔다. 238개 설계 팀, 4만 명 이상의 엔지니어, 800대 이상의 IBM RS/6000 워크스테이션이 동원됐다
  • 이 프로젝트가 PDM(Product Data Management)을 단순 도면 관리 도구에서 산업 표준 기술로 끌어올렸다
  • 2000년대 중반 CIMdata가 ‘Product Lifecycle Management’ 개념을 정립하면서 PLM은 자동차·전자·소비재 전 산업의 뿌리 기술이 됐다

1990년 10월, 유나이티드 항공이 새 비행기 34대를 주문했다.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 “또 예전처럼 종이로 만들지 마십시오.” 이 한 마디의 요구가 보잉이 30년간 이어온 데이터 관리 문법을 산산조각 내버렸고, 오늘날 우리가 PLM이라고 부르는 기술의 토대를 만든 시험대가 되었다. 이 이야기의 전반을 따라가 보면, 왜 오늘날 AI가 다시 이 분야를 흔들고 있는지가 자연스럽게 보인다.

PDM 이전의 세계 — 도면 창고와 카본지

1980년대까지 항공기 하나를 설계하려면 수만 장의 종이 도면이 필요했다. 보잉 747(1969년)은 약 7만 장의 도면으로 만들어졌고, 그 도면들은 물리적 도면 창고(drawing vault)에 보관되었다. 설계 변경이 생기면 담당 엔지니어가 카본지를 넘기며 관련 도면을 수동으로 모두 갱신해야 했다. 누가 어떤 버전을 보고 있는지, 무엇이 최신인지는 문서 관리 담당자의 머릿속에만 있었다.

문제는 설계 변경 하나가 어떤 무게를 갖는지였다. 만약 기체 A 도면을 바꿨는데 전장 B·유압 C·구조 D 팀이 그 변경 내역을 모르면, 실제 조립 단계에서 부품끼리 부딪치는 사건이 터졌다. 747 수준의 기체는 실물 목업(mock-up), 즉 모든 부품을 나무·금속으로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는 공정이 필수였다. 목업 하나에 수백만 달러, 수정에 몇 개월이 걸렸다.

여기서 잠깐 — 오늘날 중소기업의 연구소에서 “이 도면이 최신이에요?”를 매번 되묻거나, 엑셀 BOM과 설계 도면이 안 맞아 문제가 터지는 장면은 단순히 IT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1970~80년대 보잉이 겪었던 그 문제의 축소판을 여전히 그대로 겪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CAD가 문을 열다

CATIA는 1977년 프랑스 다소 항공(Dassault Aviation)이 미라주 전투기를 설계하려고 사내에서 만들기 시작한 툴이었다. 당시 상업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던 CAD는 록히드가 만든 CADAM이었고, 마찬가지로 IBM 메인프레임에서 돌았다. 록히드 California에서 CADAM 터미널 수는 1976년 40대에서 1980년 220대로 늘어났다. CAD는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누가 어느 버전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해결책은 없었다.


보잉 777 — 산업 전체를 바꿔 놓은 단 하나의 프로젝트

1991년 4월, IBM·다소와의 계약

777 프로그램은 1990년 10월 출범했지만, 진짜 전환점은 1991년 4월이었다. 보잉은 IBM·다소 시스템과 협력 계약을 체결하고, CATIA V3(3차원 상호작용형 설계)를 프로젝트 전체의 설계 도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들어도 놀라운 수치 — 238개 설계 팀, 6개국에 걸친 4만 명 이상의 엔지니어, 800대 이상의 IBM RS/6000 워크스테이션이 동시에 하나의 3D 모델을 바라보며 설계를 진행했다.

결과는 항공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1994년 4월 9일 시제기 롤아웃, 6월 12일 첫 비행. 미리 컴퓨터에서 ‘가상 사전조립(digital preassembly)’을 완료해 둔 덕분에, 보잉은 역사상 처음으로 실물 목업 없이 대형 비행기를 만든 제조사가 됐다. 부품 간 간섭(interference)은 설계 단계에서 100% 검출되었고, 조립 라인의 재작업이 이전 개발 사이클 대비 50% 이상 줄었다.

4만 명의 동시 설계가 만들어 낸 새로운 문제

그런데 이 규모의 동시 설계는 기존의 종이 기반 이력 관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다른 대륙의 엔지니어들이 같은 부품을 동시에 수정하거나, 버전이 섞이거나, 검토가 끝났는지 모르는 상황 — 이 모든 것을 자동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Check-in/Check-out, 자동 버전 관리, 설계변경(ECR/ECO) 워크플로우, 권한 기반 접근 제어 — 오늘날 PDM의 기본 기능들이 바로 이 시점에 산업적 요구로 바뀌었다.

보잉은 이를 위해 IBM의 ProductManager라는 초기 PDM 시스템을 CATIA와 맞물려 운용했다. IBM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ENOVIA로 발전시켰고, 다소는 CATIA와 묶어 오늘날의 3DEXPERIENCE 플랫폼 기반을 만들었다. 즉, 777 프로젝트는 CATIA만 키운 게 아니라 오늘날 글로벌 PLM 벤더 지도 자체를 재편한 사건이었다.

하나의 관찰 — 기술 산업의 큰 변화는 대부분 ‘벤더가 가지고 온 상품’이 아니라 ‘거대 고객이 요구한 것’이 시장으로 태어난다. PLM도 마찬가지였다. 보잉 777이 요구한 ‘다국적 동시 설계를 다룰 수 있는 데이터 플랫폼’이 오늘날 모든 엔터프라이즈 PLM 제품의 DNA다.


PDM에서 PLM으로 — 2000년대의 개념 확장

1990년대 말까지 PDM은 “도면·BOM·문서를 관리하는 도구”로만 불렸다. 변화는 2000년대 중반, PLM 분석 전문 리서치 기관인 CIMdata가 ‘제품 수명 주기 관리(Product Lifecycle Management)’라는 용어를 정립하면서 시작됐다. 이 변화의 핵심은 도면 관리를 넘어, 제품이 기획(ideation) → 설계 → 생산 → 유지보수 → 폐기까지 거치는 전 수명 주기를 하나의 데이터 문맥으로 다룬다는 발상이었다.

2000년대 후반, 자동차·전자·소비재 업계가 이 발상을 받아들이면서 글로벌 PLM 시장이 폭발했다. 지멘스(Siemens)가 UGS를 35억 달러에 인수해 Teamcenter를 손에 넣은 2007년, PTC의 Windchill, 다소의 ENOVIA/3DEXPERIENCE가 3강 구도를 만들었다. 보잉이 항공 연구소에서 발견한 “동시 설계·버전 관리·설계변경 추적”이 자동차 OEM, 가전 제조사, 석유화학 설비 업체의 핵심 인프라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퍼졌나

한국은 1990년대 말 현대·기아가 CATIA를 도입하면서 PLM 진입 시장이 열렸고, 2000년대에는 삼성전자·LG가 UGS Teamcenter를 도입해 전자 부문으로 확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형 제조 특유의 요구사항(다품종 소량 생산, 빠른 설계변경 사이클, 부품 입출고 추적, 한국어 인터페이스)이 글로벌 제품의 표준 기능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대목이 생겼고, 이게 국산 PLM/PDM 벤더들이 버티는 기술적·사업적 공간이다. 이 시리즈의 뒤편에서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30년 뒤, 오늘 우리가 보는 PLM

1994년 777이 날았을 때 정제된 질문은 “종이를 어떻게 없앨까”였다. 2026년 오늘 정제된 질문은 “설계 데이터를 어떻게 AI로 읽을 것인가”다. 멀티모달 LLM은 텍스트와 수백만 장의 도면, 3D 모델, ECO 이력을 동시에 이해하는 지점까지 왜다. 지멘스는 Teamcenter에 Azure OpenAI 기반 챗봇을 붙였고, PTC는 Windchill+ONSHAPE에 GenAI 기능을 계속 얹고 있으며, 다소 시스템도 3DEXPERIENCE에 AI 온 3D를 지속적으로 밀고 있다.

만약 1994년의 보잉이 힌트를 준다면, 이건 도구 교체가 아니다. 산업 전체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물리 목업 → 디지털 마스터 모델이 한 번의 전환이었다면, 디지털 마스터 모델 → AI가 질문하고 수정 제안을 내는 모델은 또 한 번의 전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지점에서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PLM이라는 임무가 왜 만들어졌는가 — 즉 1990년대의 777 사례 — 를 알아야 한다. 이 시리즈는 그 문맥을 20편에 걸쳐 풀어서 보려고 한다.

다음 편 예고 — 다음 편은 보잉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이야기다. 엑셀로 부품을 관리하다가 생산 차질·리콜·납품 수정을 반복해 겪는 자동차 업체들의 실제 사례를 가져온다. PDM이 단순한 ‘IT 사치’가 아니라 투자 정당화가 가능한 이유를 숫자로 보여준다.


관련 글

출처

  1. IEEE Spectrum — Boeing’s Seventh Wonder (1995)
  2. NES Fircroft — The Boeing 777 And How CAD Changed The Face Of Air Travel
  3. Novedge — History of CATIA
  4. Simple Flying — Boeing 777: A Milestone for CAD in Av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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